본문바로가기

나눔마당

Junggye Yangeop Catholic Church

현재 위치

Home > 나눔마당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짧고 굵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자 대축일 (2011,7,5)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왜 그가 한국 성직자의 주보성인으로 존경을 받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최근 지난 2000년에 복원한 그의 흉상에 따르면 그는 갸름하고 인자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 명동 주교좌 본당이 2000년 11월 9일 김대건신부 흉상 복원작업 결과보고회를 가졌는데 이 결과보고회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온화한 형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일반인들의 경우 광대뼈가 돌출한 반면, 김 신부는 완만했고 이마는 곧게 서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명동본당으로부터 의뢰를 받고 복원에 착수했던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팀은 김 신부님의 눈 주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 깊게 처져 있으며, 뒤통수는 상당히 돌출 돼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상본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인자하고 눈이 예리한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참 목자의 모습을 지닌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국천주교 성직자의 주보성인이요 표상인 것을 몇 가지 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우선 누구보다도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고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닦아진 것입니다.1827년 정해박해 때 7살난 김대건 신부는 조부 택현과 부친 제준을 따라 서울울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골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전 15세까지 그곳에서 조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대건 신부님은 선교사로 오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 토마(성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 방지거(최한지의 아들)와 함께 신학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1837년 6월부터 1842년 3월까지 유학 6년만에 신학공부를 마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서품 받기 전 잠시 귀국의 길에 오른다. 수학 도중 함께 했던 최 방지거는 병사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부제서품을 받고 조선 입국을 시도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을 넘느라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고국을 떠난지 8년만인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신앙이 깊었던 관계로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고 어머니는 일구월심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일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습니다. 귀국 후 3개월 동안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 지도를 작성하며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님이나 다블뤼 신부보다 월등한 위치에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었는데, 언어나 활동의 제약이 덜했기에 입국하던 해인 1845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경기도 용인 산속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상 두 달이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서 한 사목방문 활동의 전부다. 그의 교회활동은 선교사의 입국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습니다. 그의 말년의 직책은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었습니다.


   셋째로 그 열정은 혼신의 정열을 바쳐 순교까지 할 수 있는 희생정신을 길러주었습니다.1845년 4월 30일 만주에서 입국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사가지고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와 함께 그 배를 타고 한 개의 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와 4명의 어부와 배를 타 보지도 못한 6명의 농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익숙한 뱃사람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는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밤낮 할 것 없이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배가 뒤집힐 듯 몹시 흔들렸으므로 할 수 없이 김대건 신부님은 끌고 가던 뗏목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은 두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뱃사공들은 배 멀미에 시달려 넓고 룬은 바다 위에서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배 멀미에 몹시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배는 여전히 사나운 파도 때문에 이리 저리 들까불리다 가장 중요한 키조차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돛을 둘둘 말아서 바다에 던져 키 대신으로 쓰게 하였으나 이것조차 얼마 안가서 끊어졌습니다. 이에 다시 멍석 을 나무토막에 싸매어 키로 써 보았으나 이것마저 파도가 삼켜 버렸습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도움을 빌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이 자고 비도 멈추어서 모두 이제는 살아났다고 하며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아 급한 대로 키와 돛대로 쓰게 하고 바람을 거슬러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신부님의 대담함과 침착함으로써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서품식을 받은 날이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하였다가 마침내 184년 10월 12일 강경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습니다. (1845.10.12)


  1846년(헌종12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님의 편지와 입국할 사용한 해상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로 갔다.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편지와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지 10일이 되던 날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옥을 거쳐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수많은 취조와 회유 끝에도 굴복하지 않자 마침내 그해 9월 15일 헌종은 집행명령을 내려 다음날 9월 16일 서울 한강 백사장인 새남터에서 집행되었습니다. 12명의 회자수가 내리치는 칼날 중에 8번째에 가서야 목이 떨어졌습니다.김대건 신부의 영성은 감옥에서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와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순교 직전 최후 증언)

 
 이 분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이며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의 주보이십니다. 이 분의 영웅적 생애야말로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이며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게 사셨으나 굵게 사시고 영원을 사신 분, 이 분은 진실로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보배이며 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단 앞에 한국 천주교회의 속죄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임의 고통과 쓰라린 괴로움이 있었기에 영광의 기쁨과 환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영광스런 내일을 위해 뿌려진 깨끗하고 고귀한 피, 이 피야말로 어린 양의 순수한 피로서 만인의 구원을 가져온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2역대 24,22)는 말씀처럼 사제 즈카르야는 현세적인 고통과 육신의 괴로움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이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기쁨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냅니다."(로마 5,3-4)는 의미가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 안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영웅적 사제직 수행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오늘 복음의 말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는 예수님의 언약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살신성인하는 희생과 사랑과 봉사로써 주님의 길을 걷는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처하고 있는 시대적 난제 앞에서 결코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꿋꿋하게 정의와 사랑을 외치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태장동성당 김 시몬 신부님 


<성김대건 신부님 표착지인 제주 용수 성지 2011, 05, 14>